지난 8월 5일 아침, 부산에서는 외래에 찾아온 환자에 의해서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 피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북삼성병원 임세원 교수 피살 사건이 일어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또다시 정신건강의학과에 입원했던 환자에 의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임세원 교수 피살 이후 임세원법이라고 불리는 20여 개의 법안들이 발의되었지만 그중에서 실질적으로 의료진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은 없었다.
그나마 올해 4월부터 시행되었던 의료법 개정안에서 보안인력 배치와 비상경보장치 설치를 의무화했지만, 이 법은 100병상 이상 병원만이 적용 대상이었다. 즉, 100병상 미만 병원은 적용 대상이 아니었기에 비극을 막을 수 없었다. 피살을 당한 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20병상의 개방 병동을 운영하고 있었고 환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퇴원이 가능한 치료 환경이었다. 이번 사건은 환자의 의지에 반하여 치료를 강행하고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벌어진 사건이었으며, 현재 우리나라 의료 환경은 심각한 공격성이 예상되는 환자로부터 의사를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부재하다는 사실을 이번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강제입원 요건이 강화되었다고 하는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 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정신건강복지법)은 누구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가?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환자는 의료 행위를 받는 중에 의료인에 의해 인권침해를 당할 수 있으니 보호받아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 의료인에 대해서는 의료 행위를 수행하는 중에 환자로부터 언어적, 신체적 폭력에 노출되어도 그것은 의료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의사, 의료인 특히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도 헌법에서 불가침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안전과 기본권이 보장된 진료 환경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최선의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호흡하기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같이 매우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진료 환경은 이렇게 당연한 것을 제발 지켜달라고 목놓아 외쳐야 하는 비참하고도 후진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환자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환자를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달라진다. 의사와 환자 모두가 안전한 환경에서 의료 행위가 이루어지면, 이 환자는 보건복지부 관할 기관인 병의원에서 입원 및 통원 치료를 받는 정신건강의학과 환자가 된다. 하지만 안전하지 못한 진료 환경에서 의사와 환자가 노출되면, 이 환자는 범죄자가 되어 법무부 관할 기관인 교도소로 가게 된다. 의료기관에서 치료받는 것과 교도소에 수감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환자의 인권을 더욱 보장하는 것이고, 환자에게 도움 되는 것인지 정부와 인권위 및 환자 단체 등에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부터 보험회사들은 전문인 배상 책임보험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인수를 거절하고 있고, 대신 거액의 생명보험을 가입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늘어나고 있다. 배상책임 보험회사가 보기에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매우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손해가 클 것으로 예상하여 인수를 거절하는 것이다. 배상책임 보험에서 거절당한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생명보험 가입이라는 사실은 현재 대한만국 의사들이 처한 비극적이면서도 참혹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동료의 죽음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다음 순서는 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인권위는 정신건강복지법을 통해서 정신질환자 보호만 외치지 말고,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와 의료진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안전한 진료환경이 최선의 치료 제공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환경에서 환자와 의료진 모두의 인권이 보호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고인의 발인 일이자, 대한민국 의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전국의 수많은 젊은 의사들이 단체 행동에 나서는 날이다. 의사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과 더 암울한 현실을 막기 위해 행동에 나서는 젊은 의사들의 모습이 교차되는 오늘은 슬프고도 분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이런 슬프고도 역사적인 날에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정부에 다시 한번 강하게 요구한다.
정부는 의사와 의료인의 안전한 진료 환경 확보를 위해, 책임 있고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라!
2020년 8월 7일
대한병원의사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