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8 (화)

  • 맑음동두천 -8.9℃
  • 맑음강릉 -4.5℃
  • 맑음서울 -7.0℃
  • 대전 -5.8℃
  • 구름많음대구 -4.2℃
  • 맑음울산 -3.8℃
  • 광주 -2.7℃
  • 맑음부산 -3.4℃
  • 흐림고창 -1.4℃
  • 제주 0.8℃
  • 맑음강화 -5.9℃
  • 맑음보은 -7.7℃
  • 흐림금산 -5.1℃
  • 흐림강진군 -2.3℃
  • 맑음경주시 -4.0℃
  • 맑음거제 -1.9℃
기상청 제공

THE CULTURE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 3.1운동의 선두에 서다'



3.1 운동,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대명사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3.1운동 진행 과정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세력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주로 도시나 읍 정도의 도회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면서 3.1운동이 중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3월 1일 이른바 민족대표들이 3.1운동의 지도부 역할을 사실상 포기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파고다공원의 독립선언식과 서울 도심의 1차 만세시위, 3월 5일의 2차 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당시 학생들과 관련해 편견이 있어왔던 것 같다. 사립학교, 특히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의 활약상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반면, 관립학교 학생들은 3.1운동에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말이다. 그 중에서도 관립 전문학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 학생들은 의학도이기 때문에 더더욱 당대의 역사적 현실에 관심이 적었을 것이라는 시선이 있다. 그러나 3월 1일과 5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대규모 만세시위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은 바로 경성의전 학생들이었다.


폭풍 전야의 경성의학전문학교

1916년 4월 1일 경성의전이 관립 의과대학으로서 개교했다. 정확히 말하면, 대한제국의 국립 의학교육기관이었던 '醫學校'와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를 계승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를 인계하여 개교했다. 교수진은 대다수가 일본인이었고, 학생들은 일본인과 조선인 공학이었다. 수업연한은 예과 없이 본과만 4년이었다. 모든 학사 운영이 일본인 위주였으나, 조선인 학생들은 민족차별을 받으면서도 우수한 성적과 응집력을 바탕으로 일본인 교수 및 학생들에 맞서고 있었다. 




1919년 2월, 즉 3.1운동 발발 직전의 경성의전 상황은 어떠했을까? 

당시 모든 학교의 1년 학기는 4월 1일에 시작되어 이듬해 3월 31일에 끝났다. 3월 하순에 졸업식과 봄방학이 있었고, 3월 초~중순에 학년말 시험이 있었다. 따라서 1919년 2월 경성의전은 학년말 시험을 치르기 직전 상황으로 상당히 분주한 때였다. 2월 25일부터 예비시험이 치러졌고, 1학년 학생들의 경우 3월 1일 토요일 오후에 조직학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학교 당국의 학생 통제도 강화되었다. 2월 25일 모리야스 렌타로(森安連吉) 내과 교수가 전교생을 대상으로 훈화를 했는데, "일본에 유학중인 조선인 학생들이 조선 독립에 관한 유인물을 배포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2.8독립선언). 조선에서도 이런 유인물이 배포될지 모른다. 경거망동에 참가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하라"고 학생들에게 경고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시험철인 데다가 학교 당국의 시국 관련 경고로 인해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3.1운동 참여가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1919년 1~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유행, 파리강화회의의 개최,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등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의 이성과 감성은 이미 대규모 항일운동의 발발과 독립을 염원하고 있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 서울 도심을 휘젓다

1919년 2월 서울의 각 학교 학생대표들이 독립운동 논의와 준비에 착수했을 때 경성의전 4학년 김형기와 2학년 한위건은 처음부터 학생대표 모임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한위건은 독립운동의 필요성 제기, 중등학교 학생대표들의 선정, 학생들만의 2차 시위 제안, 독립선언서 배부 등을 주도하며 당대 학생운동진영의 최고 지도부로 활약했다. 이어서 김형기, 유상규, 한위건, 길영희 등 경성의전의 학년별 대표들은 동급생들에게 3.1운동 계획을 전하며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신문 기사와 소문 등을 통해 민족자결주의와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을 알고 있던 학생들은 이에 호응하여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3월 1일 서울의 1차 시위 때 김탁원은 파고다공원 앞에서, 김형기는 종로 종각 앞 사거리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이익종은 종로4가에서 연설을 통해 독립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조선인 순사에게 시위 참여를 독려하기까지 했다.




 3월 5일 2차 시위에는 장세구, 이강, 이형원, 전진극, 김창식 등이 남대문 인근에서 시위에 참여했다. 서울의 1차, 2차 시위는 농민, 상인, 노동자들의 시위 참여를 촉발시켜 3.1운동을 거족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켰고, 아울러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1919년 3~4월 시위 현장이나 하숙집 등에서 체포된 경성의전 학생은 40명이었다. 8월에 예심(豫審)이 종결된 후 40명 중 32명, 즉 80%가 공식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서울의 7개 전문학교(기타학교 포함) 학생 중 77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그 중 경성의전 학생이 가장 많아서 32명으로 41.6%에 달했다.

경성의전 학생 32명 중에는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 학생이 많았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한 '하숙 네트워크'는 경성의전 학생들의 3.1운동 참여에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서울의 북촌이나 각 학교 인근에는 하숙집이 많았다. 전문 하숙집보다는 지식인층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더 많았다. 서울에 일찍 올라와 자리를 잡은 지식인이 고향 후학들을 하숙생으로 들이는 경우였다. 서울에 평안도와 함경도 학생 '전문' 하숙집은 제법 많았다. 같은 전문학교의 선후배뿐 아니라 서로 다른 전문학교 학생들이 하숙 생활을 통해 '동지'가 되었다. 3.1운동 과정에서도 같은 하숙집 학생들은 정세를 토론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의기투합해서 시위에 함께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성의전 학생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2학년 이강은 1919년 4월 24일 예심 판사의 신문을 받으며 이와 같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했다.
"민족이 스스로 나라를 다스려 가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현재의 조선의 상황을 보면, 교육에 관한 것에도 조선인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고, 산업방면도 한 예를 들면 조선의 좋은 토지는 동척회사(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매점을 하고 조선인은 눈물을 머금고 만주 등지로 이주를 하고 있다. 그런 점 등에 대해 불만이 있으므로 독립을 희망한다. 「李橿 조서」(1919.4.24.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신문조서)"

즉 경성의전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궁극적인 동기는 조선이 독립국이기를 염원하는 마음과 일제의 가혹한 조선 통치, 즉 민족차별과 경제적 수탈 때문이었다. 3.1운동 당시 경성의전 학생들의 이와 같은 내면과 적극적인 항일운동 참여는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의 희망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선두에서 고민하고 행동했던 학생층의 모습 그대로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졸업생, 자나 깨나 독립운동

3.1운동에 참여했던 경성의전 학생들은 그 후에도 항일 독립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했을까. 혹시 3.1운동 참여는 당시 국제적 분위기에 따른 일회성 사건이었던 것은 아닐까.

3.1운동 직후 국내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된 비밀 독립운동단체들이 결성되었는데, 3.1운동에 참여했던 경성의전 학생들도 이들 단체에서 활동했다. 3.1운동에 참여하고 체포되지 않은 이의경(훗날 소설가 이미륵)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편집부장을 맡아 언론활동을 벌였고, 3.1운동에 참여하고 체포되었으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탈출한 나창헌은 대동단에 참여하여 이강공(李堈公, 고종황제의 아들)의 국외탈출 계획에 가담했다. 3.1운동 직후 국내에서는 의열투쟁도 활발했다. 이때 오태영은 강우규 의거를 지원했고, 졸업생 허영조는 부산에서 개원 중 의열단을 위해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3.1운동 참여 경력이 있는 경성의전 졸업생과 중퇴생들은 1920년대의 후반의 대표적인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서 활약했다. 조선공산당의 핵심인물이기도 했던 한위건은 신간회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양봉근은 신간회 울산지회장과 신간회 본부 검사위원장을 맡았다. 김탁원은 신간회 경성지회, 최경하는 전남 목포지회, 정인철은 황해도 재령지회, 이강은 함남 북청지회의 핵심 간부가 되어 민족연합전선과 지역사회를 위해 노력했다. 유상규는 3.1운동 당시 경성의전 3학년 대표로 시위에 적극 참여한 후 체포를 피해 상해로 건너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였던 안창호의 비서와 안창호가 결성한 흥사단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나창헌은 3.1운동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2학년으로서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한 후 상해로 건너가 김구의 가르침을 받았다. 철혈단(鐵血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 등을 결성하여 의열투쟁에 힘썼다. 특히 1926년 상하이의 일본총영사관을 완전히 파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결국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경성의전 학생들은 3.1운동 이후에도 국내외에서 전개되었던 항일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 참고자료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9년 12월 30일 새로 발간한 『의학도, 3.1운동의 선두에 서다』 (의학역사문화원 02-2072-2635)



 



배너
배너